얀 후스(Jan Hus)
                                                                                                                   문상철

얀 후스는 1369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1415년 7월 6일에 사망했다. 그는 성직자,철학자, 종교개혁자로서 프라하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후스는 요하네스 위클리프가 사망한지 수년 후인 1384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1393년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8년부터 강의를 했으며, 1400년 경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1402년 대학 총장이 되었다.
후스는 나이 30세가 갖 넘어서 학문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개혁의 열정과 설교의 능력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고 비판한 요하네스 위클리프의 저서들에 대해서는 학자로서의 경력 초기부터 접하게 되었는데, 특별히 그의 친구 프라하의 제롬이 옥스포드에서 돌아온 다음부터는 위클리프와 후수의 사상적인 연관성은 명백해진다.후스는 초기에는 프라하대학의 다른 학자들보다 부패에 대해 덜 과격한 태도를 취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위클리프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프라하대학의 분열이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되었을 때, 후스와 제롬을 비롯한 다수의 위클리프 지지자들이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였다. 이런 가운데 1403년 5월 프라하의 독일계 학자들이 위클리프의 저서 45개 조항을 선별해서 정죄하였고, 위클리프 지지자들은 이 조항들이 그의 사상을 잘못 전달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후스가 위클리프 사상을 추종한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공표한 것은 1408년에 가서였다. 그 이전까지는 개혁의 주창자이면서도 여전히 여왕의 고해성사자였고, 궁중설교자였다. 1408년경 후스는 비로소 개혁세력의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대주교와 충돌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412년 후스는 면죄부 문제로 교황과 결정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는 교황이나 사제라고 하더라도 죄를 심판하고 사해줄 권리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교황은 세속 군주들처럼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오직 영적인 일을 관장하고 무기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황의 소집령에 불응하는 것은 정당하며, 면죄부라는 반그리스도적인 방법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교황을 비판하는 와중에 후스는 왕실의 지지를 잃게 되었으며, 파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교황은 결국 후스를 체포하고, 그 지지자들을 파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후스는 1412년 10월 프라하를 떠나 피신하게 되었다. 프라하를 떠나 은거하던 후스는 폭넓은 저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1414년 지그문트 황제의 신변 보장의 약속을 받고 콘스탄스(오늘날 독일 영내)의 종교회의 청문회에 출석한 후스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갑자기 구속되어버렸고,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부인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었던 15 명의 교황의 명단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거부 의사는 이단으로 정죄받아 1415년 콘스탄스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카톨릭교회와 화해할 것을 회유 받았으나, 후스는 그때마다 "내가 가르치고 글로 표현해온 복음의 진리 속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화염이 그의 몸을 감아 그의 목소리가 연기에 질식되기 직전에 그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후스의 모습은 보헤미아의 민족적인 신앙을 더욱 불타게 했고,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운동이 이어져서, 나중에 루터에까지 그 종교개혁 사상이 전달이 되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루터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후스의 일관성 있는 개혁 정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함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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